불과 20~30여 년 전만 해도 채용 공고나 입사 계약서에서 흔히 보던 풍경이다. 성차별이 당연시되던 1980년대, 체신부에서 한국전기통신공사(현 한국통신)로 업무가 이관되면서 일반 직원의 정년을 만 55세로 하였지만 여성이 99.9%인 교환직렬의 정년은 만 43세로, 12년이나 짧게 정해버렸다.
1983년, 만 43세가 되어 강제 퇴직을 당한 전화교환원 A씨는 '정년퇴직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 패소에도 끈질기게 싸워 1988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고, 1989년 고등법원에서 최종 승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7년. 소송 과정의 고통과 7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이 사건은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 내 '정년차별 금지' 조항을 안착시킨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2026년, 과연 우리의 일터는 성평등해졌을까?
교묘해진 간접차별… "남성은 핵심업무, 여성은 보조업무?"
오늘날의 성차별은 노골적인 '조항'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직무의 차이', '단순 업무', '조직 개편'이라는 교묘하고 은밀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나타난다.
2025년 서울여성노동자회 상담실에 접수된 사례들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A사의 경우, 남녀가 동일한 사업부에서 5년 이상 함께 일했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최대 5호봉이나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입사 당시 기본급과 고정수당부터 차이가 났지만, 회사는 "애초에 남녀가 다른 직군으로 채용되었다"고 주장했다. 남녀가 다른 직군이라는 것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남성들도 알지 못했다. 업무직의 96.8%는 여성, 사무직의 88.6%는 남성으로 분리하여 채용해 배치하고서는 남성은 핵심업무, 여성은 보조업무를 수행한다며 동일가치노동에 대한 임금 차별을 정당화한 것이다.
B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일한 업무를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사원은 7급 계약직으로, 남성 사원은 6급 정규직으로 채용하여 연봉에서 1000만 원에 달하는 차이를 두었다. 남성은 신입이어도 더 높은 직급과 임금이 주어졌고, 여성은 남성과 같은 업무를 넘겨 받아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낮은 직급과 임금이 강요되었다.
개인이 입증할 수 없는 '정보의 불균형'... 5심까지 가는 '시간과 비용'의 벽
이러한 간접차별과 관행적 차별을 여성 노동자 개인이 스스로 밝혀내고 회사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첫째, 정보 접근의 한계다. 동일가치노동 임금차별이나 승진 배제 등 간접차별을 입증하려면 전 직원의 채용 형태, 인사 평가, 호봉 테이블, 직무별 남녀 비율 등 회사 내부의 핵심 데이터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피고용인인 여성 노동자 개인에게는 이러한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이 전혀 없다.
둘째, 시간과 비용, 그리고 직업 생명의 위협이다. 지방노동위원회에 차별시정 구제신청을 하더라도 사용자 측이 판정에 불복할 경우 중앙노동위원회 재심, 행정소송 1심, 2심, 대법원 3심까지 이어지는 지루한 법적 공방이 벌어진다. 막대한 법률 전문가 수임료 등 소송 비용은 물론, 재직 중인 상태에서 사측의 보복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수년간 법정 싸움을 이어가는 것은 사실상 '직장 생활의 포기'를 의미한다.
결국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은 차별을 인지하더라도 문제 제기조차 하지 못한 채 퇴사하거나 침묵을 강요받게 된다.
'개인의 용기'를 넘어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의 작심 대응'이 필요한 이유
A사와 B사 사건이 사측의 합의를 끌어내고 남녀 분리 채용 관행을 중단시키는 성과를 거두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의 밀착 지원이었다.
상담실은 내담자의 제보를 바탕으로 법률자문위원들과 함께 채용 방식, 근로계약 내용, 실제 수행 업무, 비교 대상 근로자 여부 등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사업장 내 남녀 비율과 직무 분리 실태를 법리적으로 재구성해 노동위원회 대응을 주도했고, 재심 및 합의 과정까지 당사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민간 상담실이 '작심하고' 사건에 개입해 밀착 지원했기에 비로소 사측의 불법적 관행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1996년 OECD 가입 이래 단 한 번도 '성별임금격차 1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여성의 노동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구조적 차별을 용인하는 관행이 일터에 여전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정과제로 제시한 '고용평등 임금공시제'와 같은 임금 투명성 정책조차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현시점에서, 현장의 성차별을 직접 발굴하고 법적·제도적 싸움을 함께 수행할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2023년을 끝으로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폐지된다는 소식에 분노한 1만여 명의 시민이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저지 서명에 참여하였다 ⓒ 서울여성노동자회관련사진보기
그러나 현장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지켜온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은 윤석열 정부에서 전격 폐지된 후 여성노동자는 물론 각계각층의 부활 요구에도 불구하고 2023년 19개 단체에서 2026년 9개 단체로 축소되었다.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은 국가의 제도와 정책만으로는 충분히 포괄하기 어려운 일터의 사각지대에서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고 성평등한 노동환경을 추동해왔다. 이러한 역할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대폭 확대하고 전국적인 상담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1983년의 여성노동자의 길고 긴 싸움이 2026년에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일터의 구조적 성차별을 깨뜨리는 힘은 개별 여성의 용기에 더해, 이들과 끝까지 함께 싸우는 전문적인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의 강력한 지지·지원에서 나온다.